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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스런 독립투사 아버지
분류 담당부서 을지로동
보도일 2013-08-12 작성자 이상준
조회수 974

나의 자랑스런 독립투사 아버지










ㅇ 상해, 용정서 독립운동 투신한 김정로 선생 아들 김성식씨


ㅇ 부친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한 80년된 태극기가 보물 1호




 


 


중구 주교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성식씨의 보물 1호는 80년된 태극기다. 김씨의 아버지인 김정로 선생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하던 태극기다.


 


김정로 선생은 전북 순창군 동계 출신으로 광주고보(현 광주일고)에 입학하자마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한 주모자 중 한명이다. 일본군의 눈을 피해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있는 상해임시정부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용정을 오가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전주 건지산(현 전북대 자리)에 아지트였던 건지사라는 절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벌였다. 80년된 태극기는 김 선생이 이때 사용하던 태극기로 백범한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에게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는 상징이었으며, 이 태극기 형태는 80년이 지나었도 요즘과 크게 차이없지만 조국에 대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선생은 43년 주민의 밀고로 43명의 동지들과 함께 투옥된다. 김 선생의 아버지와 큰 형은 1년여만에 풀려났으나 그는 158일 동안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뒤늦은 재판에서 1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형기를 마치기 전에 해방을 맞았다.


 


김씨가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7살 때 바로 전주교도소에서였다. 할머니를 따라서였다.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한 그의 할머니는 보부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김 선생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오죽했으면 김씨에게 아버지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어 나간 것이니 아버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라 라고까지 할 정도.


 


김 선생은 귀국한 백범과 영원히 조국을 위한 뜻을 함께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백범이 경교장에서 총탄에 맞아 서거하면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 후 조국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정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33세의 나이로 전국 순창에서 출마해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조국의 독립과 앞날을 걱정했던 김 선생은 전주에서 심장마비로 45세의 짧은 인생을 접는다. 그 후 김씨는 88년 부친을 대신해 광주일고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김씨는 해방 이후 백범과 함께 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 9살 때 그는 백범과 마주 했다.


 


“백범 선생님이 동지새끼야, 동지새끼야 하며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른다. 백범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윤봉길 의사 다음에 대를 이어 나라에 쓸 수 있는 재목(材木)이라고까지 하셨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고 국회의원까지 했다지만 집안은 장남인 김씨가 꾸려야 했다. 동생 4명을 포함해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을 주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씨는 1976년 36세 나이로 홍제동에서 방산시장으로 건너와 10만원 짜리 방 한칸을 구해 가정집 식당을 운영했다. 지금이야 흔한 가정식 백반집이지만 당시에 김씨 부부가 처음으로 시작했다. 양철통에 구멍을 내서 버려진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짓고 아내가 준비한 맛깔스런 반찬으로 손님을 끌었다.


 


처음 접하는 메뉴다보니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 가게는 호황을 이뤘다.


 


그때 김씨는 78년부터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원봉사에 눈뜨게 된다. 80년대 당시 사고 다발 지역으로 유명했던 을지로 방산시장과 중부시장 사이 건널목에서 인간신호등을 한 것. 84년부터 무려 12년 8개월간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며 주민들과 상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당시 차 타고 가던 한 장관이 저를 신기하게 봤나봐요. 누군지 확인하라고 지시해 표창 상신도 하지 않았는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어요.”


 


김씨는 2009년 10월부터 매달 저소득 어르신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아내와 고아원, 재생원 등도 방문하고 있다. 한때는 자비로 5년 동안 을지로동 어르신 600명을 대상으로 경로잔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렵게 살아봤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지요.”


 


지금까지 35년째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하는 열혈 자원봉사자이지만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부친을 생각하면 한쪽 마음이 아린다.


 


“내 이름을 팔아서 잘 되려고 하지 말고 나보다 더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부친의 말씀 때문에 봉사를 하며 열심히 살아 왔죠.”


 


그런데 이젠 오직 나라 일만을 걱정하고 나라에 충성한 부친의 애국심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뿐이다. 그래서 가게 이름도 11년전에 ‘단군나라’로 바꿨다.


 


2008년에는 부친의 유품이자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는‘천부경’수첩과 백범에게 받은 휘호 사본 등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국학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던 것은 아버지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아버지가 원치 않더라도 아버지의 혼을 후손들에게 알리는게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해요.”

첨부파일

을지로동-독립투사 아들 김성식.jpg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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